送春哭
w. Liter
유리 깨지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손에서 시큼한 오렌지 향이 났다. 유리조각에 긁힌 발등에서 붉은 액체가 흘러 물감처럼 번졌다. 창밖에서 트럭 한 대가 시끄럽게 클락션을 울려댔다. 이리저리 욕지거리를 나누는 소리가 한 겹 여과 없이 그대로 밀려들었다.
또 이런다. 오늘만 벌써 네 번째. 아침에는 화장실에서 괜히 물기를 밟고 자빠지질 않나, 어제까지 멀쩡했던 딸기는 하루아침에 물러버리고, 음악을 좀 들을까 했더니 에어팟은 고장이 나 버렸다. 어느 해고 네가 가버린 날이면 꼭 이랬다. 제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어. 나는 이제 너의 목소리조차 생각이 나질 않는데 어째서인지 자꾸만 이 날짜에 묶여 버둥댔다. 아. 설마 내가 아직도 네 기일 산책을 다니고 있어서인가. 붉어져가는 오렌지 주스를 물끄러미 보다가 화장실로 향했다. 발에 유리조각이 박혀 내딛는 걸음마다 붉은 발자국이 생겼다.
신기하리만치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프다는 통증도, 짜증난다는 감정도, 가뿐히 허무로 수렴했다. 어쩌면 익숙해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예전이라면 호들갑을 떨며 난리를 쳤겠지. 하지만 지금의 나는 묵묵히 손을 씻고 바닥을 어떻게 닦아야 할지 고민할 뿐이었다.
흐르는 물에 끈적임이 씻겨 내려갔다. 채 마르지도 않은 손을 대강 털며 발바닥에 박혀 있는 잔해를 뽑아냈다. 물에 쓸려 따가운 부위에 반창고를 붙이고, 익숙하지 않지만 익숙한 손놀림으로 파편들을 정리했다. 바닦은 물티슈로 대강 닦고 유리조각은 신문지에 넣어 둘둘 감았다. 종량제 사야겠네. 그런 생각이나 하면서 냉장고를 열었다. 오렌지 주스는 못 쓰게 됐으니 되는 대로 둥굴레차나 챙겨 가방에 넣었다. 냉장고를 닫자마자 빠져나온 냉기에 괜히 소름이 돋았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가.
신문지 뭉치를 챙기고 신발을 신는데, 누군가가 뒤에서 뭉치를 쑥 빼내갔다. 네 장례식을 치룰 때의 일이었다. 네게 찾아올 가족이 하나 없어서 내가 애인 자격으로 상주 안장을 차고 앉아 있을 때. 유일하게 우리의 곁을 지켜주었던 너의 친구가 조문 선물이라며 가져온 향수병을 실수로 깨먹은 적이 있었다. 네가 쓰던 것과 같은 향을 흠뻑 뒤집어쓴 채, 나는 깨진 향수병을 신문치에 둘둘 말아 들고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계속 앉아 있기엔 너의 향이 너무나도 강했어서. 그때 그 애가 그 뭉치를 뺏어 들고는 내게 삼각김밥을 건넸다. 두 개가 하나로 붙어 있는 제품이었다.
너 하루종일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
그 말을 듣고서야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나는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고 안으로만 고여 퉁퉁 부은 얼굴로 조용히 김밥을 받아들고 복도로 나섰다. 여기저기서 곡을 하는 사람들. 육개장과 전을 나르는 사람들. 입구에 모여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 나는 모든 소란에서 도망쳐 주차장 구석에 있는 나무 밑 벤치로 향했다. 입춘이 한참 지나 한껏 시든 벚꽃잎이 눅눅하게 떨어져 눌러붙은 벤치를, 나는 네가 그래주었듯 손으로 쓸어내곤 궁상맞게 쪼그려 앉았다.
처음 깐 김밥은 제육소스가 들어간 것이었다. 소스를 피해 김과 밥만을 깨작깨작 뜯어먹자 얼마 전의 일이 떠올랐다. 그건 꽃이 피지도 않은 벚나무 아래 앉아 내가 처음으로 싼 도시락을 까 먹던 우리의 모습이었다. 오징어 모양으로 자른 비엔나 소시지를 머리에 올린 채 평생 키울 거라고 말하는 너와, 신기하게도 정말 정수리에 딱 붙어서 떨어지지도 않고 잘만 버티는 소시지를 보며, 나는 죽어라고 웃어댔다. 실컷 사진을 찍을 때까지도 소시지는 이상하리만치 네 머리에 딱 붙어 있었다. 야, 걔도 니가 마음에 든 모양이다. 그냥 나 말고 걔랑 살아. 삐진 척 뱉은 말에 넌 곧장 소시지를 집어와 홀랑 입 속으로 던져넣고는 배시시 웃었다. 죽겠다, 진짜. 이래갖고 너 없으면 나 어떻게 사냐. 내 말에 네가 철없이 답을 던졌다. 그럼 나 대신 징징이네 가족 만들어주면서 살면 되지. 어, 꽃잎 잡았다. 이걸로도 만들어볼래? 그 모습에 나는 또 웃음을 터뜨렸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우리 쪽을 보며 고개를 저었지만 하나도 상관이 없었다.
그렇게나 내 웃음은 너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두 번째 김밥을 베어물었다. 벚꽃잎이 시들시들 떨어져 딱 베어먹은 부분 위에 얹혔다. 꽃잎을 보자 왠지 모르게 짜증이 치밀었다. 어느새 고작 한 입 남은 김밥이 눈에 들어왔다. 네가 없다며 곧 죽을 것처럼 밤낮 없이 울며 이름을 불러대던 입으로 내가, 여전히 생을 탐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역겨웠다. 내 몸에서 나는 너의 향수 냄새가 특히. 그래도 병에 이어 김밥까지 던져버릴 수가 없어서 자리에서 일어나 벤치 위에 한 입 남은 김밥을 두고는 등을 돌렸다. 몇 발짝 가지 않아, 바람이 불었다. 꽃잎이 우수수 떨어져 주차된 차들의 보닛을 덮었다. 가만히 서 있던 내 신발 위에도 분홍 잎이 가득했다. 결국 나는 다시 걸음을 돌려 나머지 김밥을 입 안에 욱여넣었다. 지독히도 꼬르륵대는 배를 부여잡은 채 김밥을 으적으적 씹어 삼켰다. 눈앞의 사물이 하나도 분간되지가 않았다.
시야가 온통 분홍빛이었다. 여기도 분홍. 저기도 분홍. 제멋대로 번진 봄이 사방에 걸려 있었다. 새파랗게 솟은 잔디 위로 어린애들이 뛰어다녔다. 그날과 같았다. 아니 사실, 항상 그날과 같았다. 너와 농담을 주고받았던 벚나무 아래. 그 벤치. 고만고만한 인파. 이 지루한 풍경 속에서 오직 나 혼자만이 그때와 확연히 달랐다.
메고 온 가방에서 샌드위치를 꺼내 물었다. 땅콩 버터에 스크램블드 에그. 약간의 양상추와 베이컨. 내가 가장 좋아하는 조합에 아무래도 좋은 음료를 한 모금 마시며, 나는 딸기를 가져왔어야 하는데 하고 생각했다. 기분 좋게 음악이라도 들으면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고 생각했다.
딱 그 정도였다. 더 이상 나의 산책은 너의 기일을 기리기 위함이 아니었다. 이제 이곳에서 너의 그림자를 볼 수 있는 사람이라곤 단 한 명도 남지 않게 되었다. 이 자리에 남은 것은 다만 네가 보고 싶어했던 흐드러지는 벚꽃들과 완연한 봄의 날씨뿐. 그리고 바람을 따라 쏟아져 내리는 꽃잎의 폭포를 바라볼 때 고개를 드는 나의 작은 의문 하나만이 네 존재를 기억했다. 모든 것이 끝난 뒤에도 벚꽃이 필까. 내가 당장 저 폭포 안으로 뛰어 들어간다면 그 반대편에 도착할 수 있을까.
샌드위치를 감쌌던 종이가 손 안에서 우그러졌다. 방울방울 봄비가 떨어지고 있었다. 끝까지 이 모양이라고, 볼멘소리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이면 벚꽃을 볼 수 없겠지. 생각하는 사이 전화가 울렸다. 네가 모르는 사람이, 네가 모르는 장소로 나를 불렀다. 당연히 가겠다고 했다. 곳곳에서 사람들이 비를 피해 달아나고 있었다. 벤치에서 등을 돌리고 가방을 끌어안았다. 등 뒤로 멀어지는 벚나무에서 마지막으로 꽃잎이 쏟아져 내렸다. 근처까지 날아온 꽃잎에서 낯익은 향기가 풍기다가 흩어졌다.
텅 빈 도로를 달렸다. 그렇게 나는 봄을 보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