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 물은 썩는다
w. 아이텐
꽃병에 또 한 송이의 꽃이 꽂힌다. 시든 꽃은 다시 피어나지 못하고 새로운 꽃으로 바뀌었다.
그 안에 담긴 물 또한 그러하다.
익숙하게 그것을 반복하는 섬섬옥수를 건조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빛 한 줌 들지 않는 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이라 할 수 있는가. 온갖 것들에 막힌 그것은 벽과 다름없다. 이 방안의 공기마저도 지긋지긋하다. 하지만 끝내 내 폐에 들어차는 마지막 숨까지 이것이 전부일 거란 것을 알았다.
내 침대 옆엔 서툰 사랑의 주인이 서 있다. 으레 그렇듯 그 입술은 무언갈 달싹였지만 더는 그 음성이 들리지 않았다. 귀보다도 심장이 멀었다. 의미를 해석할 머리도 받아들일 마음도 모두 오래전에 기운을 잃고 시든지 오래였다. 여전히 흐르는 목소리의 주인은 이 사실을 모를까. 문득 마주한 눈동자가 머금은 떨림이 말하고 있었다. 이미 알고 있노라고. 그럼에도 말을 멈출 수 없노라고. 멈추면 그 마지막 꽃잎도 떨어질까 봐. 아직도 길을 모르는, 부질없는 발악이었다.
폐하, 저는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저 한 줌 물에 발을 담근 채.
두 눈동자는 듣지 못한 것처럼 외면했다. 이젠 바스러져 원망조차 남지 않은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곧 여느 때처럼 쉽게 거두었다.
감흥 없는 시간이 한참 흘렀다. 방안에 스미던 빛이 저물고 나서야 홀로 남았다. 뉜 몸을 힘겹게 뒤척이다가 긴 숨을 내쉬었다. 그 어느 때나 생각하였던가. 이렇게 홀로 차가운 끝을 맞이할 것이라고. 두 눈에 들어오는, 밤이 내린 방은 여전히 호화로웠지만 따스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두 팔에 채워진 것은 그저 화려한 팔찌와 발찌였지만 구속구처럼 무거울 뿐이었다.
한때 이 손발이 자유롭게 춤주던 적이 있었지. 가진 것 없이도 수려한 움직임만으로 세상을 품은 것만 같았다. 나는 춤을 사랑했고, 춤을 추는 나를 사랑했다. 왕궁 연회에 참여하지 않았더라면 난 지금도 자유 속에서 춤추며 더 넓은 세상을 거닐고 있었을 것이다. 친애하는 이들과 허름한 배로 바다를 건너보고, 저잣거리에 널린 음식을 먹고, 비를 맞으며 거닐면서도 생기와 기쁨에 차 있었을 것이다. 몇 번이고 그렸던 광경이 지금도 닿을 것만 같다. 그 소리와 냄새, 바람이 모두 맴도는 것만 같다. 하지만 눈을 뜨면 그저 어둠에 잠긴 꽃병뿐이다. 그마저도 시야가 흐려서 잘 보이지도 않았다.
'너를 나의 비로 삼을 것이다. 네가 이 나라의 황후가 되는 게야.'
'폐하, 저는 궁에서 살 수 없습니다.'
'네 신분 때문이라면 염려치 말라. 그 누구도 감히 내 뜻에 반할 순 없으니.'
'그런 이유만이 아닙니다.'
그런 이유가 아니에요.
갈라진 음성이 목이 메이게 흘러나왔다. 당신은 나를 사랑한다 말하면서도 나를 사랑하는 법을 몰랐다. 내가 무엇이고, 내가 어떤 것을 필요로 하는지 아무것도 몰랐다. 마지막까지도 당신은 모를 거야. 귓가에 쟁쟁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궁은 제가 지내기에 너무도 삭막합니다. 온갖 음모와 모략으로 가득한, 그런 곳에선 전 살 수 없습니다.'
'내가 너를 지킬 것인데 어찌 그런 염려를 하는 것이냐.'
'허나 폐하, 저는 더 넓은 세상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살고 싶습니다.'
'허면 내가 너를 데리고 종종 먼 곳까지 여행을 가도록 하지.'
'폐하께서 가져온 꽃은 아름다우나, 꽃병에 갇혀 흐르는 물 없이 고인 그것에만 꽂혀 있다면 결국엔 져버릴 것입니다. 제가 한떨기 꽃과 같다고 하셨지요. 어찌 그것을 몰라주십니까. 저를 사랑하신다면 부디 자유롭게 놓아주세요.'
'너야말로 어찌하여 내 마음을 모르는 것이냐. 내 너를 지킨다 하였다, 너를 품고 넓은 세상도 보여주겠다고 했거늘 그저 내 손을 빠져나가려는 말뿐이구나. 너는 나의 비가 되어야 한다. 이이상 황명을 거역한다면 삼족을 멸할 것이다.'
잔혹한 사람.
음성은 스치는 바람과 같았다. 매말라 움푹 패인 뺨위로 가늘게 뜨거운 것이 흘러내렸다. 그마저도 힘겨워서 그저 한줄기에 그쳤다. 당신은 결국 날 지키지 못했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들로부터 지켜주지 못했다. 무엇으로부터 지켜야 했는지도 모르겠지.
숨이 차갑다. 몸은 어느 때보다도 무겁다. 주인조차 그러쥘 의지를 잃은 몸뚱이를 기어코 붙들어두던 약들이, 당신이 애원하듯 퍼부어댄 것들이 서서히 약해져가는 것을 느꼈다. 아, 죽어가는 것이다, 어느 때보다도 선명하게. 두렵지도, 기쁘지도 않았다. 바짝 매마른 꽃이란 아무런 감흥이 없는 무언가였다.
무겁기만 하던 두 눈이 감겼다.
버겁기만 하던 의식이 멀어지고,
암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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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의 서거일 후, 황제는 황후를 위해 만들어 두었던 정원에만 머물렀다. 지존의 명이 없었으나 언제까지고 국장을 미룰 수 없기에 조용히 치뤄졌다. 황후의 물건은 전부 황명에 따라 황제의 방으로 옮겨졌다. 검은 천이 드리운 방, 그 방에 남은 것은 먼지 앉은 화병과 그것이 품은 한줌의 물, 말라비틀어진 꽃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