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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별   

w. 냥님

찻물이 잔에 담긴다. 시비가 옷자락 소리도 안 나도록 조심히 물러난다. 봉해진 서신을 열어본다.

찻잔을 식히며 인사말부터 천천히 눈에 담는다. 익숙하고도 그리운 필체. 

 

우리가 처음 마주쳤던 궁의 수풀. 늘 미안해하던 왕세자의 허락을 받아 정체를 감추고 저잣거리에 나와 같이 간식을 나누었던 일. 커다란 연못에 배를 띄웠던 일. 그리고 맞닿았던 손의 온기. 다소 시시콜콜해 보일 둘만의 기억이 먹 내음 속에 아름답게 반짝인다.

 

단단하게 이어지던 글자는 시간이 지나며 천천히 흐트러진다. 

 

세자는 몸이 좋지 않았다. 아마 주상께 건강한 아들이 있었더라면 그에게 세자의 자리가 넘어갔을 만큼. 세자는 음식도 많이 가렸다. 독에 대한 내성을 쌓을 만큼 몸이 건강하지도 못해 그의 식사는 늘 까다로운 기미 후에나 겨우 내어진다고 들었다. 세자저하를 처음 뵈었을 때 그분은 이미 삶을 체념하신 듯하였다. 후계가 불안정한 채로 주상께서 손을 놓아버리시니 충직스러웠던 신하들도 그만 등을 돌리고 점차 나라는 기울어갔다.

 

그래서 그랬던 걸까. 세자저하께옵선 연상의 세자빈을 두고 일찍 승하하셨다. 

 

나라가 혼란하니 국경 밖의 유목민족들이 넘어와 노략질을 일삼았고 제국은 왕국을 돕겠다며 학자들과 무인들을 보냈다. 반강제적인 문화 교류의 대가는 바로 세자빈이었다. 안 그래도 세자빈마마의 자리는 궁에서 붕 뜬 상태였다. 더이상 세자빈도 아니니 처소도 바뀌었다. 세자빈께선 한적하니 둘만 만나기에 더 좋지 않으냐며 웃으셨지만.

 

이후로 선박에서 쓰신 건지 획이 조금씩 삐쳐난다.

 

제국에서 문화교류의 일환으로 부군을 잃고 위치가 애매해진 세자빈을 친교의 의미로 모시겠다는 황제의 친서를 든 사신이 도착했다. 주상께선 시간을 끌다가 그러겠노라, 하셨다. 세자빈마마께는 그저 제국의 황상을 모실 준비를 하라는 어명만이 떨어졌을 뿐이다. 그리고 그날 밤 후원의 연못에서 우리는 마지막 인사를 했다. 세자빈마마께 이대로 도망치자고 했었지만, 거절하셨다. 마마의 눈은 시름에 잠겨 내리깔려 있으면서도 한번씩 반짝거렸다. 월담 대신 잘 벼려진 작은 단도를 쥐여드리고 마마의 안색과 같은 하얀 옥가락지를 받았다. 무인이기에 늘 장신구는 거절해왔었지만, 이 백옥 가락지 만큼은 마마 그 자체이기에. 마지막이라는 현실이 뒤통수를 때리는 것 같았다. 정말 맞기라도 한 것같이 눈물이 샘솟아 겨우 인사를 올리고 도망쳐버렸다.

 

다시 육지에서 쓰신건지 단정한 글씨가 담담히 이어진다. 이미 결심을 마친 장수의 유언이. 숨이 멎을 것 같다. 

 

-나는 황제를 죽일 생각이다.

-살아남을 수는 없겠지.

 

바짝 굳은 몸이 겨우 얕게 호흡한다. 짤막하고 단순한 계획. 무모하기만 한 계략. 

 

-내세에 꼭 다시 만나자.

 

웃음이 비실 나왔다. 세자빈마마는 이미 이 땅에 없으실 테지. 그렇다면 더는 지킬 것도 없다. 이까짓 나라쯤이야, 모두 멸망하길 바란다.

 

곱디고운 비단 치마를 벗는다. 백옥 가락지를 목걸이로 만들어 건다. 무복을 입고 갑주를 찬다. 한동안 내려놓았던 검을 든다. 

Written by five wri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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