猫緣
w. 낰낰
또 왔네.
얘. 듣고 있어? ... ... 저거 봐. 또, 또 안 들리는 척.
저 애는 비만 오면 꼭 여기서 한참씩 있다 간다. 언제나처럼 노란 비닐우산을 들고 이 나무 아래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비가 그칠 때까지. 멍하니. 여긴 마땅히 구경할 거리도 없는데. 마치 일시 정지 버튼을 눌러 놓은 동영상처럼 말이다. 그러니까 네가 여기 발을 들인 게 언제부터였더라, 사실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난다. 오지 말라고 그렇게 말해도 내 말은 듣지도 않고. 바보 같아. 하긴, 너는 원래부터 그런 아이였지.
나무 위에 올라와 앉아 있으면 세상이 다 작아 보인다. 높이 올라온 만큼 성큼 내려앉은 하늘이 코끝에 걸린다. 오늘은 또 무슨 성이 났는지. 구름이 몰려오더니 아까부터 하늘에서는 소나기가 주룩주룩 내린다. 눅눅하게 가라앉은 젖은 공기는 풀 냄새, 나무 냄새를 한결 더 짙게 만든다. 약간의 우울감과 기분 좋은 무기력함. 나른한 기분이 발끝부터 척추를 타고 피어오른다. 흔들거리는 다리 아래로 바람이 살랑이면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 꾹꾹 기지개도 켜본다. 너는 아직도 저 아래 쪼그리고 앉아있다. 언제까지 내게 정수리만 보여줄 참인지.
바보야, 거기 아니야. 여기야.
심술이 돋아서 흙을 한 줌 쥐어 팍 내던진다. 투두둑, 어깨 위로 흙더미가 떨어지면 그제야 네가 위를 올려다본다. 왔어? 이렇게 있는 힘껏 웃어 보이며 손까지 흔들어주는데 너는 또 못 본 척. 다시 흙더미에 고개를 박는다. 좀 서운하네. 나 보러 온 거 아니었어? 아주 제멋대로지, 그냥. 저 땅바닥이 뭐가 그렇게 재미있다고 우산까지 씌워주면서 열심이다.
봉긋하게 솟아오른, 그저 작은 흙무덤에 불과할 뿐인 바닥을.
─────
너는 예전부터 그랬다. 첫 만남만 해도 그래. 어느 순간 예고 없이 나타나서 내 근처를 기웃거리더니, 밀어내도 다가오고 다시 또 다가오고. 내가 외면하고 돌아서도 봐줄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결국 제 성에 찰 만큼 날 곁에 붙들어 두고 한참 시달리게 만든 뒤에야 겨우 돌아갔었다. 하지 말라고, 싫다고, 모르는 사람의 도움은 받지 않는다고. 내가 할퀴고 깨물어도 굴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표정으로 한참이나 여기 앉아있다가 갔다. 내 말을 알아들으면서도 모른 척 하는 건지, 아님 정말 못 알아듣는 건지.
어느 순간부터는 나도 포기하게 되었다.
그리고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네가 곁에 있는 것이 어색하지 않게 되었다. 네가 밀고 들어와도 괜찮은 선이 조금씩 얕아지는 줄도 모르고. 어쩌면 조금, 정말 조금은 네가 오기를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몰라. 그래. 사실은 기다리고 있었다. 네가 오는 시간을.
장마철의 눕눕한 공기는 정말이지 끔찍하다. 벤치에 앉지도 못하고 온몸이 다 흠뻑 젖어선,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추위에 오들오들 떨며 이 비가 언제쯤 끝날까 그냥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밖에 없었으니까. 그때의 난 어려서 아직 나무도 제대로 탈 줄 몰랐다. 그러니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어린나무가 펼쳐주는 나뭇잎 우산 아래에 숨어 몸을 웅크리고 장마가 끝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정말이지 비가 오는 날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싫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건, 비가 오면 그 아이가 오지 않는다는 거다. 그리고 내가 그걸 알고 있다는 게 더 싫었다. 차라리 눈치채지 못했으면 좋았을걸. 그러면 비가 내리는 날을 싫어하지 않았을 텐데. 이렇게 비가 올 때마다 하늘을 탓하며 축 처지지 않아도 됐을 텐데. 다시 혼자로 돌아가야만 한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몸에서 수분이 쭉 빠져나가는 것처럼 무력감에 젖어 든다. 원래부터 난 혼자였고, 아쉬울 것 하나 없는데. 이상하게 거꾸로 솟아 삐죽거리는 마음은 네가 너무너무 밉기만 했다.
다음 날 해가 뜨면 너는 아무렇지도 않게 뻔뻔히 다가온다. 내가 그렇게 기다린 줄도 모르고 말야. 늦었네, 괜히 네 발을 톡 차면 -아마도 집에서 몰래 챙겨왔을- 간식거리들을 주섬주섬 늘어놓았다. 그럼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우리는 그 나무 밑 벤치에 앉아서 함께 밥을 먹고 햇볕을 쐬었다. 그때의 난, 너의 그 한결같은 표정을 알 수가 없었다. 졸린 건지 배가 고픈 건지,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 물어봐도 대답도 안 해주고. 늘 그렇게 세상만사 다 귀찮다는 표정만 짓고 있었다. 그랬었으면서.
그건 무슨 표정이었을까? 동네 꼬마들이 내게 돌을 던질 때 네가 지었던 그 얼굴. 그리고 밤늦게 술에 취한 아저씨들이 내게 발길질할 때 구겨지던 그거. 또 언제였지, 동네 주민들이 빗자루를 들고 쫓아와 우리 집을 죄 들쑤셔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을 때. 그때도 넌 어딘가 비틀린 이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괜찮아. 이런 일 한두 번도 아니고. 정말 나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네가 왜 더 속상하다는 듯 구는지 모르겠다. 난 사람의 감정을 읽어내는 데에는 영 재주가 없어서 그냥 네 발끝을 툭툭 차고 신발 끈을 풀어놓았었다. 그러면 제 옆에 의기소침하게 앉아있던 작은 아이는 또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선 내 목을 끌어안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미안해.
너 참 웃긴다. 날 못살게 군사람들은 따로 있는데 왜 네가 미안해해? 날 아픔에서 구해준 것도 너, 내게 마실 물과 먹을 것을 주던 것도 너, 날 지켜주던 것도 너. 너 참 웃긴다, 이렇게 내게 많은 것을 주고 있으면서.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바보야, 그냥 계속 쓰다듬어줘. 그렇게.
─────
그해의 장마는 유난히 길었다. 그 아이와 함께 보낸 시간이 무색하게도 제게 주어진 생은 너무나 짧아서, 거세게 쏟아지는 빗줄기에 아슬아슬하게 남은 생명의 불꽃이 차츰 씻겨져 나간다. 얼마나 되었을까, 이 비가 쏟아진 게. 감기에 들어버린 건지 눈앞이 흐려지고 몸은 자꾸만 떨렸다. 작은 몸을 웅크려 이젠 제법 높아진 나무 아래, 이파리를 이불 삼아 몸을 누인다. 조금만 더 내게 시간이 있었다면 저 나무 꼭대기에 닿을 수 있었을 텐데. 그러면 높기만 하던 저 하늘과 인사도 할 수 있고. 너보다도 훌쩍 위에서 너를 내려다보며 놀릴 수도 있었을 텐데.
하지만 자꾸 눈이 감겨. 지금은 너무 졸리니까... 조금만, 조금만 자고 일어나서 다시 나무 타는 연습을 해볼게. 너에게 자랑할 수 있게.
오랜 비가 그친 다음 날, 오랜만에 그 아이가 모습을 비춰주었다. 너는 두리번거리며 열심히 풀숲을 헤치고 다녔다. 나 여기 있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더는 몸도 움직이지 않고,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가만히 기다렸다. 얌전히. 어디 가지 않고, 네가 찾아줄 때까지.
그 애는 내 몸을 두 손으로 고이 들어줬었다. 그리고 한참이나 품에 안아주었다. 몸이 왜 이렇게 차가워? 너도 비가 오던 지난날, 그 시간 동안 나처럼 고스란히 다 맞느라 감기가 들어버린 거야? 축 늘어진 내 몸 위로 떨어지던 물방울은 소나기였을까. 아직 끝나지 않은 장마가 네 눈에서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그래도 비 덕분에 흙이 질어져서 땅을 파내기 편해서 다행이었다. 그 아이가 우리가 함께 점심을 먹던 나무 아래에 내 몸을 눕히고 다독여 흙을 덮어주었다. 이제 비가 올 때마다 구멍 뚫린 이파리 우산을 쓰지 않아도 돼. 따뜻한 새집이 생겼으니까. 그러니 또 나랑 놀고 싶으면 언제든 여기 들러줬으면. 내가 허락한 유일한 친구. 소나기처럼 잠깐씩, 그냥 스치듯 지나가도 괜찮다. 난 언제나 여기서 너를 기다리고 있겠다.
비는 싫었지만 소나기는 좋았고, 인간은 싫지만 너만은 참 좋았다.
아. 움직였다.
노란 우산이 출렁거린다. 어느새 비가 그친 모양이다. 너는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쭉 펴고 우산을 접는다. 이제 가는 거야? ... 또 대답 안 하지. 부끄러워하긴. 다 알고 있다. 매번 비 오는 날마다 우산을 들고 여길 찾아오는 이유. 그 계절. 오랜 장마가 끝나던 그 밤, 비가 오는 동안 이름 없는 동네 길고양이 한 마리가 죽었다. 그게 네 잘못이 아닌 거 너도 알고 있을 텐데. 못내 그날이 후회가 되었나보다. 그래서 비가 오는 날마다 우산을 들고 내 무덤가를 서성이는 거, 다 알고 있다.
이것 좀 봐. 나 이제 나무도 잘 타. 빨리 칭찬해줘. 몸을 일으켜 꼬리를 살랑거리며 시선을 끌어보지만, 그 아이는 옷이나 툭툭 털며 갈 채비에 한창이다. 너무하네. 오랜만에 왔으면서. 그럴 거면 오지 마. 투정을 부리듯 나무에서 폴짝 뛰어내려 네 어깨에 올라탄다. 무겁던지, 말든지. 네 뺨에 제 뺨을 비벼본다. 이래도 아는 척 안 할래? 에취-! 갑자기 네가 재채기를 한다. 이런, 내 수염이 간지러웠나 보다.
이전의 네가 그랬던 것처럼 오늘은 내가 너를 끌어안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이젠 슬퍼하지 않아도 돼. 인간의 시계와 우리들의 시계는 다르니까. 여기엔 더 이상 나를 괴롭히는 술취한 아저씨들도 없고 빗자루를 들고 쫓아오는 아줌마들도, 그리고 돌멩이를 던지며 위협하던 꼬마도 없다. 그러니 난 지금 행복해.
작별의 시간은 순식간에 다가온다. 조금씩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바라본다. 야옹- 이번에야말로 내가 내는 소리를 들은 것일까. 너는 뒤돌아서서 잠깐 내가 있는 쪽을 내려다보더니 곧 다시 사라져간다. 노란 우산이 젖은 바닥에 끌려 얇은 자국을 남긴다. 짧은 소나기 같았던 만남이 지나면 남은 것은 다시 또 긴긴 침묵이다. 갈증으로 메마른 목을 겨우 축였을 뿐인데, 너는 벌써 사라지고 없다.
다음 소나기는 언제 올까.
시나브로, 구름이 물러나고 해가 떠오르면 나무 밑 조그마한 무덤 곁에 핀 들꽃이 고개를 든다.
